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예프 루스 (문단 편집) === 쇠퇴 및 멸망 === [youtube(0kMonEmadLE)] [[파일:13세기 초 루스 지도.png]]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루스 >1169년 루스 공후들 중 가장 세력이 막강하고 야심이 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 공후의 군대가 키예프를 차지했다. 보골륩스키 자신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아들을 보내 전투를 치르게 했다. 키예프를 점령한 그의 군대는 3일 연속 도시를 약탈했다. 보골륩스키는 키예프로 옮겨와서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보골륩스키가 클라즈마 강변에 있는 자신의 수도인 블라디미르를 선호한 것은 12세기 루스 정치, 경제,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키예프와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이 끊임없는 정쟁에 휘말려 있는 동안 키예프 세계의 변방에 있는 주요 공국들이 더 부유해지고 강해졌다. >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인 카르파티아 산맥 아래에 있는 [[갈리치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원 아래 [[다뉴브강]]을 이용해 발칸 지역과 교역을 했다. 이곳의 공후들은 공국을 번성시키는 데 드니프로 강 교역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는 볼가강 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불가르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북서쪽의 [[노브고로드 공화국|노브고로드]]는 [[발트 해|발트 지역]]과의 교역으로 부를 쌓았다.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여전히 존재했고, [[쿠만|폴로베츠족]]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역량은 더 증가했지만,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루스에서 더 이상 유일한 교역로도 아니고 중요한 생명선도 아니었다. >---- >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12세기]] 초반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로가 더 각광을 받게 되면서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 키예프 루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기에 무역 쇠퇴는 국가 경제의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대공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보다는 대공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봉건적인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http://rozanov.egloos.com/1366456|대크킹시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루스를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대공은 다시 세력을 키워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하기도 했는데, 뱌체슬라프 1세 때부터 쫓겨났다가 복위함이 관례처럼 되풀이되었다. 심지어 류리크 2세는 무려 '''5번'''이나 즉위했다. 이렇게 키예프 대공 자리가 불안정해지자 키예프가 각 공국을 통제할 수 있는 힘 또한 약해졌다. 키예프 루스는 [[므스티슬라프 1세]]대에 브세볼로드 1세의 자손들을 모두 [[동로마 제국]]으로 추방했지만,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이후 여러 공국들로 분열된 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등이 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자르 칸국]]과 [[페체네그]]족을 주무르던 키예프 루스였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 즉 폴로베츠족과 [[불가르 칸국|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괴로워하였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니프로 강|드네프르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던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그 키예프조차도 고대 시절, 대표적인 유목민이었던 [[스키타이]]족이 정착해 살던 곳이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9e1254a17ceecf28c4edcad3229fe69.jpg]] 이런 상황에서 분열되어 있었던 루스 공국들은 1223년 '''[[몽골 제국]]'''이 숙적인 쿠만을 침공하자 쿠만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 파악하고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불세출의 명장 우량카이 [[수부타이]]에게 대패한다. 이번 침공은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호라즘 왕조]] 잔당을 처리하고 지나가다가 건드려본 정도였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기고도 그냥 돌아갔지만, 시간이 흘러 1237년에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본격적으로 루스를 침공한다. 바투는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 동쪽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박살내며 키예프로 진격했다. 키예프 대공은 싸우기 전에 도망가버렸고 시민들은 군사 지도자 드미트로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했다. 결국 [[키예프 전투|치열한 공성전]] 끝에 성벽은 무너지고 키예프 루스는 처참하게 멸망했다(1240년).[* 참고로 이때 대공이였던 미하일 2세의 손녀도 죽었다고 한다.]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의 척박한 삼림 지대나, 반대편인 러시아 남부의 [[스텝]]으로[* 훗날 [[카자크]] 중 한 일파인 '돈 카자크'의 선조들 중 하나가 됐다고 전한다.] 대거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빛나는 문화도 쇠락하고 키예프 루스의 영토 대부분이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렸다. 몽골인들은 고향과 환경이 비슷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직할통치했고, 삼림지대에 있는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등 루스 북부 쪽은 지구 반대편 한반도의 고려처럼 간접통치를 시행했다. 결국 몽골의 지배는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금씩 힘을 길러 몽골을 쫓아낼 때까지 계속된다. 1326년에는 [[루스]] 세계 전체의 [[정교회]]를 관할하는 키예프 부주교좌도 전쟁과 몽골의 직접지배로 쇠퇴한 우크라이나를 떠나, 힘을 기르고 있던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키예프 대공 직위는 명목상으로 킵차크 카간 밑 루스 공국을 대표하는 작위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를 점령하자 리투아니아 대공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가 소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